출처: ARENA KOREA http://www.arenakorea.com/report/?Act=View&Seq=498
Words 이주영(영화 칼럼니스트) Editor 정석헌 illustration 차민수
배우라는 이름. 그것은 세상의 수많은 직업의 종류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의 숱한 연기자들은 이 칭호를 얻기 위해 애쓴다.
다소 쑥스러운 이 타이틀 게임은 시쳇말로 충무로라 불리는 한국 영화계에선 더욱 유별나게 성행한다.
대체 한국의 연기자들은 왜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걸까? 연극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연기, 스크린에 투영된 연기는 타인의 삶을 주체화한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탤런트, 연기자 등의 명칭을 털어내고 배우가 되려는 걸까? 탤런트 혹은 연예인이라 불리면 어떻고, 배우라 불리면 또 어떻길래 말이다.
그 두 영역 사이에는 어떤 미묘한 간극이 존재하길래, 연기하는 많은 이들이 스크린에 뛰어들며 배우란 타이틀을 거머쥐려 하는 걸까?
통상적으로 배우라는 명칭은 ‘연기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등을 두고 연기자 혹은 탤런트라 부르지 않는다.
외국의 경우 그 여하를 떠나 연기를 펼치는 모든 매체에 참여한 사람을 ‘액터(배우)’라 칭한다.
하지만 한국의 평단 및 관객에겐 ‘연기를 잘해야 배우지’라는 개념이 꽉 들어차 있다.
권상우와 조인성의 예를 보아도 이런 관념 속 재단은 쉽게 발견된다.
그들을 한류 스타로 만든 멋진 드라마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두 주인공에게 섣불리 배우란 타이틀을 안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하 감독의 조련하에 빚어진 두 사람과 조우했을 때 평단은 그들을 배우라 불렀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가 그 대표적인 예. 조인성이 당분간 연기 활동을 접은 채, 아직 시나리오도 나오지 않은 유하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의 저널과 관객은 연기적 ‘탤런트(재능)’에 따라 배우와 연기자를 구분한다.
또 제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도 TV 브라운관에서만 날뛴다면 배우란 칭호를 얻기 힘들다.
일단 스크린으로 진출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영화배우, 연극배우, 뮤지컬 배우란 이름은 있어도 TV 배우란 명칭은 없다.
텔레비전 연기자란 이름만 주어질 뿐이다. 이는 매체의 유료화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생기는 구분이다.
영화 관객은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 몇 천원의 입장료를 지불한다. 우리는 공중파 드라마를 보기 위해 돈을 내진 않는다.
물론 시청료라는 명목의 돈이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지만 개별 작품을 위해 유료 시청자가 될 필요는 없다.
연극, 뮤지컬처럼 영화는 돈을 내야만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공간적 한정성이 있다.
‘그곳에 가야 그들을 볼 수 있다’는 제한성은 연기자에게 일종의 신비로움을 부여한다.
그래서 무수한 매체의 연기자들이 너도나도 영화에 출연하려 안달한다.
그럼 영화에만 출연하면 모두 배우라 불리는가?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날개가 꺾이긴 했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당시만 하더라도 비, 아니 정지훈은 월드 스타라 불리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연예인이었다.
그는 몇몇 인기 드라마에도 출연하며 연기적 가능성을 보였다. 그리고 영화 데뷔작을 선택하는데 조금은 ‘정치적’ 의도를 엿보였다.
그의 선택은 <올드보이>의 칸 수상 이후 작가적 위치를 점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었다.
하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는 기염을 토했음에도 관객을 극장으로 모으지는 못했다.
일단 탤런트가 배우로 불리기 위해서는 그 이름값을 해내며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지훈은 배우란 타이틀을 얻는 데 실패했다.
봉준호란 괴물 같은 감독의 이름이 있었지만 <괴물>의 멍청한 강두는 송강호만이 해낼 수 있는 캐릭터였다.
<밀양>의 구구절절 여인 인생은 전도연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역할이었다. 한국 영화의 위기와 맞물려 스타 캐스팅이 큰 덕을 보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배우’의 이름값이 관객 몰이에 한몫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객의 지갑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이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배우와 탤런트를 구분하는 주요소로 작용한다.
전광렬이나 김명민 같은 연기자들을 예로 들어보면 어떨까? 20년 가까이 연기 생활을 해온 전광렬은 <야망>, <허준>, <종합병원> 등의 드라마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배우라 부르지 않는다.
그는 2001년 <베사메무쵸>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는 실패했고, 그는 여전히 탤런트란 직함이 더 잘 어울리는 연기자다.
그런데 그와 함께 주연을 맡은, 최근 <뜨거운 것이 좋아>로 스크린에 컴백한 이미숙은 배우란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하얀 거탑>으로 국민 연기자가 된 김명민은 또 어떤가? 그는 <소름>이란, 한국 공포 영화에 길이 빛날 수작에 출연했지만 그 역시 탤런트가 더 잘 어울린다.
현재 그는 <리턴>이란 스릴러의 개봉을 앞두고 있고, <파트너>란 액션 영화에도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배우 김명민’이라 부르기엔 어색함이 있다. 아직 그는 관객의 지갑을 열 만큼의 공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쩐의 전쟁>으로, <파리의 연인> 이후 다시 한 번 SBS에 효자 노릇을 한 박신양은 앞의 여러 요소를 적절히 만족시키니 배우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는 <편지>, <약속>, <범죄의 재구성> 등으로 관객을 유혹했으니 말이다. 배우와 탤런트의 간극에는 예술에 대한 동경도 존재한다.
연극 무대에서 탄탄한 연기 공력을 쌓아왔고, 영화에서 빛나는 연기력을 뿜어내며 관객에게 어필하는 연기자들은 배우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배우라는 타이틀에는 영화보다 앞서 대중 예술로 사랑받아온 연극이 차지하는 비중을 배제할 수 없으니 말이다.
TV 연기자들이 배우로 칭해지지 않는 것에는 분명 매체의 예술적 기치도 작용한다. 영화는 탄생 초기부터 ‘제7의 예술’이라 불렸다.
미학적 논의에서도 영화는 거론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는 별 언급이 없다는 점도 연기자들이 배우란 칭호를 탐내는 이유 중 하나다. 이쯤 되니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기존에 언급한 연기자들 이외에 또 다른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 바로 장동건, 정우성, 강동원 등과 같은 이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탤런트라 부르지 않는다. 탤런트라고도 규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배우란 이름으로 호명할 뿐이다.
하지만 <중천>의 언론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극장 앞에 모인 기자들은 정우성의 연기 자질을 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콧구멍만 벌렁거리더군” 등의 코멘트들이었다. 장동건이 출연한 <태풍>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핏발만 세우면 다 연기야?” 등이 그에게 던져진 가혹한 채찍이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가 공개되자 강동원이 연기한 ‘슬픈 눈’ 캐릭터를 두고 “연기가 안 돼서 일부러 대사를 안 준 거야?”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들을 배우라 부른다. 연기력과 상업성을 따져봤을 때, 전자의 비중은 턱없이 모자라고, 후자의 무게는 꽤 나간다.
이런 구분으로 놓고 본다면 분명 정지훈도 배우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현재 강동원 주연의 후반 작업에 여념이 없는 이명세 감독의 주장을 곁들이면 그들을 배우라 부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명세 감독은 현존하는 감독 중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손꼽힌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영화적 언어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전작에 이어 왜 또 강동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는 뛰어난 배우야. 강동원을 비롯 장동건, 정우성 같은 사람들은 영화배우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연기를 연극적 잣대로 재단해버려.
스크린 공간의 연기는 완전히 달라. 이건 완전히 새로운 연기거든. 아무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야.” 이 감독의 말에 따르면 속칭 꽃미남 스타들이라 칭해지는 그들은 하나님이 “너희들은 영화란 매체로 가라”고 삶의 지침을 지정해준 ‘배우’들인 셈이다.
여하튼 한국적 상황에서 배우와 탤런트의 구분에는 전자 쪽에 훨씬 많은 무게가 실린다.
그런데도 이 경계는 여전히 어사무사(於思無思)하다. 누구를 배우라 부르고, 또 누구를 탤런트로 규정지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앞서 언급한 연기력, 상업성 등에 의해 구분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이란 좁은 땅에서 배우란 타이틀은 이상하리만치 ‘신성화’되어 있다.
“이왕 연기를 시작했으면 ‘배우’가 돼야 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 남의 인생을 산다는 건 모두 동일선상의 연기다.
연기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또 다른 구분이 굳이 필요한 것인지, 퍽 의문스럽다.
배우라는 이름. 그것은 세상의 수많은 직업의 종류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의 숱한 연기자들은 이 칭호를 얻기 위해 애쓴다.
다소 쑥스러운 이 타이틀 게임은 시쳇말로 충무로라 불리는 한국 영화계에선 더욱 유별나게 성행한다.
대체 한국의 연기자들은 왜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걸까? 연극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연기, 스크린에 투영된 연기는 타인의 삶을 주체화한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탤런트, 연기자 등의 명칭을 털어내고 배우가 되려는 걸까? 탤런트 혹은 연예인이라 불리면 어떻고, 배우라 불리면 또 어떻길래 말이다.
그 두 영역 사이에는 어떤 미묘한 간극이 존재하길래, 연기하는 많은 이들이 스크린에 뛰어들며 배우란 타이틀을 거머쥐려 하는 걸까?
통상적으로 배우라는 명칭은 ‘연기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등을 두고 연기자 혹은 탤런트라 부르지 않는다.
외국의 경우 그 여하를 떠나 연기를 펼치는 모든 매체에 참여한 사람을 ‘액터(배우)’라 칭한다.
하지만 한국의 평단 및 관객에겐 ‘연기를 잘해야 배우지’라는 개념이 꽉 들어차 있다.
권상우와 조인성의 예를 보아도 이런 관념 속 재단은 쉽게 발견된다.
그들을 한류 스타로 만든 멋진 드라마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두 주인공에게 섣불리 배우란 타이틀을 안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하 감독의 조련하에 빚어진 두 사람과 조우했을 때 평단은 그들을 배우라 불렀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가 그 대표적인 예. 조인성이 당분간 연기 활동을 접은 채, 아직 시나리오도 나오지 않은 유하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의 저널과 관객은 연기적 ‘탤런트(재능)’에 따라 배우와 연기자를 구분한다.
또 제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도 TV 브라운관에서만 날뛴다면 배우란 칭호를 얻기 힘들다.
일단 스크린으로 진출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영화배우, 연극배우, 뮤지컬 배우란 이름은 있어도 TV 배우란 명칭은 없다.
텔레비전 연기자란 이름만 주어질 뿐이다. 이는 매체의 유료화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생기는 구분이다.
영화 관객은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 몇 천원의 입장료를 지불한다. 우리는 공중파 드라마를 보기 위해 돈을 내진 않는다.
물론 시청료라는 명목의 돈이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지만 개별 작품을 위해 유료 시청자가 될 필요는 없다.
연극, 뮤지컬처럼 영화는 돈을 내야만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공간적 한정성이 있다.
‘그곳에 가야 그들을 볼 수 있다’는 제한성은 연기자에게 일종의 신비로움을 부여한다.
그래서 무수한 매체의 연기자들이 너도나도 영화에 출연하려 안달한다.
그럼 영화에만 출연하면 모두 배우라 불리는가?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날개가 꺾이긴 했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당시만 하더라도 비, 아니 정지훈은 월드 스타라 불리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연예인이었다.
그는 몇몇 인기 드라마에도 출연하며 연기적 가능성을 보였다. 그리고 영화 데뷔작을 선택하는데 조금은 ‘정치적’ 의도를 엿보였다.
그의 선택은 <올드보이>의 칸 수상 이후 작가적 위치를 점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었다.
하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는 기염을 토했음에도 관객을 극장으로 모으지는 못했다.
일단 탤런트가 배우로 불리기 위해서는 그 이름값을 해내며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지훈은 배우란 타이틀을 얻는 데 실패했다.
봉준호란 괴물 같은 감독의 이름이 있었지만 <괴물>의 멍청한 강두는 송강호만이 해낼 수 있는 캐릭터였다.
<밀양>의 구구절절 여인 인생은 전도연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역할이었다. 한국 영화의 위기와 맞물려 스타 캐스팅이 큰 덕을 보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배우’의 이름값이 관객 몰이에 한몫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객의 지갑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이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배우와 탤런트를 구분하는 주요소로 작용한다.
전광렬이나 김명민 같은 연기자들을 예로 들어보면 어떨까? 20년 가까이 연기 생활을 해온 전광렬은 <야망>, <허준>, <종합병원> 등의 드라마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배우라 부르지 않는다.
그는 2001년 <베사메무쵸>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는 실패했고, 그는 여전히 탤런트란 직함이 더 잘 어울리는 연기자다.
그런데 그와 함께 주연을 맡은, 최근 <뜨거운 것이 좋아>로 스크린에 컴백한 이미숙은 배우란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하얀 거탑>으로 국민 연기자가 된 김명민은 또 어떤가? 그는 <소름>이란, 한국 공포 영화에 길이 빛날 수작에 출연했지만 그 역시 탤런트가 더 잘 어울린다.
현재 그는 <리턴>이란 스릴러의 개봉을 앞두고 있고, <파트너>란 액션 영화에도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배우 김명민’이라 부르기엔 어색함이 있다. 아직 그는 관객의 지갑을 열 만큼의 공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쩐의 전쟁>으로, <파리의 연인> 이후 다시 한 번 SBS에 효자 노릇을 한 박신양은 앞의 여러 요소를 적절히 만족시키니 배우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는 <편지>, <약속>, <범죄의 재구성> 등으로 관객을 유혹했으니 말이다. 배우와 탤런트의 간극에는 예술에 대한 동경도 존재한다.
연극 무대에서 탄탄한 연기 공력을 쌓아왔고, 영화에서 빛나는 연기력을 뿜어내며 관객에게 어필하는 연기자들은 배우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배우라는 타이틀에는 영화보다 앞서 대중 예술로 사랑받아온 연극이 차지하는 비중을 배제할 수 없으니 말이다.
TV 연기자들이 배우로 칭해지지 않는 것에는 분명 매체의 예술적 기치도 작용한다. 영화는 탄생 초기부터 ‘제7의 예술’이라 불렸다.
미학적 논의에서도 영화는 거론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는 별 언급이 없다는 점도 연기자들이 배우란 칭호를 탐내는 이유 중 하나다. 이쯤 되니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기존에 언급한 연기자들 이외에 또 다른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 바로 장동건, 정우성, 강동원 등과 같은 이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탤런트라 부르지 않는다. 탤런트라고도 규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배우란 이름으로 호명할 뿐이다.
하지만 <중천>의 언론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극장 앞에 모인 기자들은 정우성의 연기 자질을 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콧구멍만 벌렁거리더군” 등의 코멘트들이었다. 장동건이 출연한 <태풍>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핏발만 세우면 다 연기야?” 등이 그에게 던져진 가혹한 채찍이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가 공개되자 강동원이 연기한 ‘슬픈 눈’ 캐릭터를 두고 “연기가 안 돼서 일부러 대사를 안 준 거야?”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들을 배우라 부른다. 연기력과 상업성을 따져봤을 때, 전자의 비중은 턱없이 모자라고, 후자의 무게는 꽤 나간다.
이런 구분으로 놓고 본다면 분명 정지훈도 배우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현재 강동원 주연의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영화적 언어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전작에 이어 왜 또 강동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는 뛰어난 배우야. 강동원을 비롯 장동건, 정우성 같은 사람들은 영화배우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연기를 연극적 잣대로 재단해버려.
스크린 공간의 연기는 완전히 달라. 이건 완전히 새로운 연기거든. 아무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야.” 이 감독의 말에 따르면 속칭 꽃미남 스타들이라 칭해지는 그들은 하나님이 “너희들은 영화란 매체로 가라”고 삶의 지침을 지정해준 ‘배우’들인 셈이다.
여하튼 한국적 상황에서 배우와 탤런트의 구분에는 전자 쪽에 훨씬 많은 무게가 실린다.
그런데도 이 경계는 여전히 어사무사(於思無思)하다. 누구를 배우라 부르고, 또 누구를 탤런트로 규정지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앞서 언급한 연기력, 상업성 등에 의해 구분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이란 좁은 땅에서 배우란 타이틀은 이상하리만치 ‘신성화’되어 있다.
“이왕 연기를 시작했으면 ‘배우’가 돼야 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 남의 인생을 산다는 건 모두 동일선상의 연기다.
연기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또 다른 구분이 굳이 필요한 것인지, 퍽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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